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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와의 대화

이한규  플라톤  
출판사 두리미디어   발간일 2010.12.15
책소개 인간의 참다운 삶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 '너 자신을 알라'서구인들에게 ...



 

<생각하는 인문학>을 읽고 난 뒤 다음 책으로 이 책을 선택했다.

부족하고 앞뒤가 맞지 않는 논리의 전개로 그리 좋지 않은 평가를 줬지만 그의 생각의 방향과 내용은 아직까지도 머리 속에 남아 이지성 작가를 그렇게 만든(?) 책이 궁금하여 쉽게 접근 할 수 있는 소크라테스를 선택했다.

 

소크라테스하면 철학자의 대부로서 논리법과 산파술로 도장깨기,

즉 그 시대 현자들의 절대적인 앎에 대한 근자감을 무참히 깨고 다닌 사람이다.

쉬이 창작은 어렵고 비판하기는 쉽다라 생각하여 소크라테스를

불평, 불만만 내놓는 이상한 사람이라 생각 할 수도 있지만

산파술이라 함은 질문을 함으로서 자연스럽게 그들의 무지를 일깨워 주는 방법이다.

 

'너 자신을 알라'

 

철학자는 지혜를 구하는 자라는 뜻으로서,

피타고라스가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다.

소크라테스가 생각하는 정의는,

철학은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에서 출발하여 자신이 잘하는 분야에서 최상의 기능을 하며 지혜를 구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남 잘 되는 꼴이 보기 싫어 애먼 소피스트들을 찾아가 그들의 무지함을 들춘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동굴을 나와 진정한 이데아를 본 자로서 나름 실천하는 학문이라는 좋은 취지로 그들을 계몽하기 위해 사형을 당할 만한 못된 짓(?)을 하고 싸돌아다닌 것이다.

따지고 보면 소크라테스 친구인 카에레폰이 괜히 델포이에 있는 아폴론 신전에 들려서 이런 사단이 났다.

 

'아테네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는 누구인가?'

'소크라테스'

 

카에레폰이 카에테키테 소크라테테스니 잇타.

소크라테스는 델파이신탁을 증명하기 위해 우선 반대 논제인

아무것도 모른다라는 질문에서 자신을 평가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이를 모르는 사람보다 더 뛰어나다. 고로 나는 아테네에서 제일 뛰어난 지혜를 가졌다.' 라는 결론을 도출 해 낸다.

 

소크라테스는 누군가를 가르친 적이 없다. 왜냐하면 그는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는 과거의 지식이자 일방적인 가르침인 ''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언제든지 질문 할 수 있는 대화를 더 선호했다.

저서도 쓰지 않았고 가르친 적도 없으니 자칭 그의 제자들이 멋대로 그에 대한 회고록을 썼는데 이것이 발달이 되어 당시 '소크라테스 대화'라는 문학 장르가 생겼다.

많은 사람이 그가 누구인지 평가를 하고 설명을 했지만 아쉽게도 소실되어 그나마 잘 보존 되어 있는 크세노폰과 플라톤의 저서가 대표 서적으로 남아있다.

이는 성경과 같은 성격을 보이는데 고의든 은연중이든 작가의 의중이 책에 포함 될 수밖에 없어 소크라테스의 진정한 철학이라고 말하기에는 찝찝한 면이 없지않아 있다.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의 자족적인 삶을 강조하여 완전 무결한 철학자로 표현한 반면

플라톤은 무지의 상태에서 지혜를 구하는 자로 표현하여 인간으로서 끊임없이 철학을 추구하는 인간적인 욕망을 더 강조하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는 역사적 소크라테스보다는 서술적 소크라테스다.

(이같은 면모가 <생각하는 인문학>의 서술 방식에 영향을 줬을 것이라 생각된다.)

 

욕구, 기개, 이성은 인간을 이루는 요소이다.

인간의 영혼은 하나의 단일한 것이 아니라 위의 3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전쟁 중에 물을 마시고자 하는 것은 욕구를 뜻하며 혹시 독이 있을 줄 몰라 자제하는 것이 이성이다.

그럼 기개는 무엇인가. 욕구를 절제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분노이다.

기개와 이성을 같이 보는 사람이 있지만 기개는 이성의 보조적 요소 일 뿐 이성을 대체 할 수 없다.

국가유기체설, 국가 또한 이 3요소로서 작용하는데

욕구는 인간의 생산 욕구를 이성은 행정, 사법, 입법 등의 통치 기능을, 기개는 경찰, 군대와 같이 국가 치안이나 안보 등으로 비유 할 수 있다.

 

철학자는 지혜를 사랑한다. 고로 이데아를 추구한다.

이데아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항상 같은 모습을 보이는 절대적인 사실을 뜻한다.

모두들 안철수가 대통령감이라 생각하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대통령감에 대한 생각의 정도에 차이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대통령감이라는 사실 그 자체는 절대적 사실로서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 그 자체이다.

프로그래밍으로 비유하자면 객체지향언어의 인스턴스에 비유 할 수 있다.

 

이런 이데아에 대한 사랑을 에로스적 사랑이라 한다.

에로스는 다이몬(신과 인간의 중간)으로 풍족의 신과 가난의 신 사이에서 태어났다.

항상 아름다운 것을 추구한다는 것에서 풍족의 신의 면모를 가졌고

정작 본인은 아름답지 않은 곳에서 살고 있다는 점에서 가난의 신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사랑, 에로스가 추구하는 사랑이다.

플라토닉 러브라고도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선호하지 않는 사랑이다.

 

사랑은 영원하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철학자는 사랑을 추구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인간은 필멸자로 불린다. 반드시 죽는다.

그렇다면 철학자는 꿈같은 허상을 추구하는 사람인가.

사랑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사람은 자식을 가진다. 자신의 유전자를 물려줌으로서 자신의 이름을 물려줌으로서 영생하는 것이다.

철학자는, 그리스 시대의 철학자는 이름뿐만 아니라 자신이 사랑했던 학문 또한 물려주는 것으로서 그들의 사랑을 유지했다.

여성보다는 남성, 수염이 나지 않은 젊은 남성에게 자신의 학문을 가르침으로서 영생을 살고자 하였다.

이를 플라토닉 러브라 한다.

물론 학문뿐만 아니라 항문으로도 그 사랑을 표현했다.

소크라테스 또한 동성애에 동참 했으나 그의 파트너이자 제자의 증언에 따르면 그리 즐기지는 않은 것으로 나와 있다.

현재는 플라토닉 러브를 육체적인 사랑이 아닌 정신적인 사랑으로 그 뜻이 바뀌어 전해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동성애를 뜻하니 말하는 사람에 따라 그 의도를 한번쯤은 의심 해 봐야 한다.

 

Do you wanna do 플라토닉 러브? ANG?

 

오해하지는 말라. 필자는 <구름>의 저자 아리스토파네스가 아니다.

 

'앎은 설명하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질문으로서 본디 알고 있는 앎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메논이라는 사람이 질문했다.

'어디를 모르는지 모르는데 어찌 모르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말 할 수 있습니까?'

소피스트의 제자였던 그는 논리로서 소크라테스를 놀리며 떠 보기 위해 이러한 질문을 했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앎은 내재되어 있던 앎을 상기하는 것이라 하며 메논의 노예와 기하학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서 몸소 그 과정을 보여주었다.

소크라테스는 메논의 어린 노예에게 직접적인 설명 없이 질문만을 함으로서 스스로 답을 도출 할 수 있도록 함으로서 기하학을 전혀 몰랐던 노예에게 기하학에 대한 관념과 그와 관련된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메논은 이를 보고 상기론에 대해 인정 하였지만 필자는 오히려 이 논거가 맞지 않다 생각된다. 소크라테스는 현세가 아닌 저승에서 경험 한 것들이 바로 인간에 내재되어 있어 앎이란 이를 상기하도록 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이는 윤회설, 예토전생으로 확장하여 왜 인간이 윤리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논거로도 작용한다.

앎이 이미 내재 되어 있어 이것을 끌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면 오히려 질문하는 것이 그 사람을 옥죄고 제약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한다.

소크라테스와 메논의 노예간의 대화를 살펴보면 산파술의 의미처럼 선택지가 주어지는 것을 알수 있다. 선택지라 함에서 이미 노예는 갈 수 있는 길이 한정되어 자신에게 내재 되어 있던 앎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질문자의 앎에 귀속된다.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내재 된 앎이 있다.

다만, 현세가 아닌 저승 같은 미지의 세계에서 본 앎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 우리는 추론과 논리로서 그 앎을 확장하는 것이다.

이것이 산파술을 가능하게 하는 배경이다.

한 가지 뚜렷한 사실만 알고 있다면 굳이 암기 하지 않아도 그 원리나 이치를 깨달을 수 있다. 그럼에도 현재 교육은 이 앎을 깨닫는 기술을 가르치지 않고 암기 위주의 교육을 실시 함으로서 하나의 개성을, 하나의 individual을 말살 시키고 있다.

마치 메논의 노예처럼.

그 노예는 기하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반면 기하학이라는 틀에 갇혀버리게 되었다.

 

 

소크라테스는 재미있고 흥미 있는 사람이다.

 

악법도 법이다. 그런데 잘못된 법은 바르게 세워야 한다.’

정의는 강자의 이익, 맞다. 뭐가 문젠가?’

 

등의 흥미 있는 자소서도 남겼다.

 

문득 후기를 작성하다 보니 책의 모든 내용을 적시 할까 염려 되어 줄이고자 한다.

가끔 어떤 한 사건에 대해서 생각 할 필요가 있을 때 소크라테스처럼 순진하게 스스로에게 질문하고자 한다.

트라시마코스에게 정의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설명하는 소크라테스.

그의 민주주의에 대한 반항을 왜곡 할 수 밖에 없었던 그의 영향력.

 

소크라테스는 어쩌면 민주주의에 처음으로 혁명이라는 단서를 심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비록 내가 이 독배를 마시지만 내가 잘못해서가 아닌 현재 아테네를 사랑하고 그 아테네를 떠날 수 없었고 그 재판 과정을 다 받아들여 할 이야기를 다 했기에 마신다.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내가 이 독배를 마신다고 해서 나의 잘못을 시인 하는 것이 아니다.

누구든 잘 못된 것이 있다면 국가를 설득하고 그래도 아니 되면 국가를 엎고 새로 만들어라.

다만 나는 국가를 설득하는 길만 선택 했을 뿐이다.

 

정의는 강자의 이익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이익이라는 것은 소비자와 생산자 간에 이루어진 합의를 바탕으로 발생하는 것으로,

상호간에 만족 된 결과를 도출해야 한다. 도출 과정 간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관계를 이의를 제기 할 수 있으며 때로는 파기 할 수 있다.

정책에서 통치자의 이익이 완전히 배제 될 수는 없다. 그러니 탄핵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정의는 강자의 이익처럼 보인다.

하지만 강자의 이익은 어디까지나 그 강자에게 힘을 주는 사람의 동의를 얻어야 가능 한 것이다.

 

어쩌면 당연하듯이 받아들인 관념에 대해 다시금 생각 해 봐야 할 시간을 가져야 할지도 모르겠다. 소크라테스는 정말로 재미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왜 이 사실을 나에게 숨겼을까잉?


노예들에게 생각은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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