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은 인간의 내재된 본능일까?
영화 안에서 미국은 어느 날 어떤 날을 선포하게 된다.
단 하루! 어떠한 범죄를 저질러도 처벌 하지 않는 날.
이 날로서 인간 안에 내재 되어 있던 폭력성을 해소하고 나머지 364일은 범죄를 줄이자는 취지에서 만들어 졌다.
영화상에서는 이러한 정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와 더불어 보안 설비 관련 일을 하고 있던 제임스 샌딘은 호황을 누리며 가족들과 함께 이 날을 대비하고 있었다. 그 날, 제임스는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보안을 작동 해 사방을 폐쇄했다.
그런데 가족 중 한명인 아들 찰리 샌딘이 어그로를 끌기 위해 관종 짓으로
‘구해달라는 한 흑인을 집안으로 끌어 들이게 된다.’
그 흑인을 쫓아 온 한 무리는 ‘정당한 욕구를 풀기 위해’ 돼지 한 마리를 내 놓으라고 협박하게 된다...
스릴러 영화답게 적당하게 맛있게 공포를 잘 버무렸다.
영화 보는 내내 왜 한국은 이렇게 영화를 만들지 못할까라는 한탄까지 하게 되었다.
단순히 피가 낭자하고 죽이기에만 열중 했다면 B급 영화였겠지만 인간의 생명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의미 있는 영화였다.
역시 미국의 가족문화와 우리나라는 많이 다르구나.
영화 상 샌딘 가족은 식탁에서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자유로히(?) 이야기 하며 모두 동등한 가족 구성원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어머니 역인 메리 샌딘은 아들 장난에 웃으면서 그리고 그를 존중하고 독려하고 아버지인 제임스도 자식들을 하나의 인격체로 대해준다.
특히 이 같은 특징이 두드려지는 것은 아들 찰 리가 모든 원흉인 흑인 한명을 끌어들이고 가족들 몰래 숨겨주기까지 하는데 아무도 찰리를 원망하는 사람도 화 내는 사람이 없었다.
분명 우리나라에서 관종 짓을 한다면 모르는 남부터 악플을 달고 비난하고 특히
‘남들은 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너만’이라는 식상한 레퍼토리와 함께 일베로 몰아 세웠을 것이다.
영화 보는 동안 필자 또한 찰리 명치 한번 갈겨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모든 생명이 존중 받아야 하는 것은 맞지만 가족의 안전을 희생 하면서까지 자기 뜻을 관철 해야 했을까?
그래 철 없으니까 순간 판단 착오로, 실수로 들여보냈다 치자. 그런데 바깥에 미친 살인자 집단이 안 내 놓으면 죽이겠다고 협박을 하는데 그걸 또 가족들 몰래 흑인을 숨겨 줄 필요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도 샌딘 가족은 이런 찰리 관종을 감싸고 심지어 나중에는 그의 뜻을 이해하게 된다.
우리나라에 오래 살아서 그런지 아직까지 생명 존중 사상에 의해 가족 생명 경시 사상을 가진 찰리의 행동을 이해 할 수 없지만 그의 가족이 보여준 관용 정신은 정말 존경스러웠다.
어째서 외국에서 노벨상이 나오고 혁신이 이루어 질 수 있는지 이 영화에서 절실히 가르쳐준다. 우리나라는 효율과 합리에 빠져 옳은 길보다는 정답으로 가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어른들이니, 먼저 경험 한 것들이 많으니 이 길이 옳다라는 경직 된 생각으로 가정에서부터 학교 나아가 직장 그리고 죽는 날까지 배우고 가르치고 이해하고 있다.
여기다 어린이는 동등한 인간으로서 아닌 지켜줘야 하고 어리석은 자라 생각한 나머지 그들의 의견을 무시하는 것이 당연시 여기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안철수를 어린이에 비유 한 것이다. 지금의 결과가 문제가 있으면 간단하게 지금까지 해 왔던 행동들을 반성하고 변화 시키면 되는데 우리나라는 이 간단한 해결법도 하지 않을려고 한다. 바로 경험의 부재로 인한 정답이 아니면 어쩌지라는 불안 때문에.
안철수의 대통령토론 때 연설은 어린애 같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가치가 있다. 하나의 현상에 대해서 경직된 사고가 아닌 다양한 시각에서 순수하게 관촬하고 평가하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바로 어린이들이다. 현재 상황을 타계 할 수 있는 행동을 이끌 수 있는 시각이 어린이들이다. 그들의 사고가 반드시 정답이라는 것이 아니다. 그들도 틀릴 수 있다. 다만, 그래도 한번쯤 듣고 생각 해 보고 판단해야 하는데 단순히 자신이 생각한 정답(지지 하지 않은 사람)이라 하여 어린아이의 말로서 치부 해 버리고 비판하는 일부 한국인들의 졸렬성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논리적인 근거로 그를 비판한다면 이해한다.
하지만 늘 MB 아바타라는 논제와 관련 없는 이야기로 그의 말을 무시하기만 하는 일부 한국인들, 이 사람들이야 말로 적폐의 아바타라 칭하고 싶다.
적폐청산에 있어 지금 정권의 행보에 찬성하지만 법에는 성역이 없어야 한다 생각한다. 야당 말처럼 이명박근혜 뿐만 아니라 그 이전 대통령들도 문제가 있다면 응당 처벌해야 한다.
적폐 아바타들은 이 같은 합리적인 의구심을 특정한 진영의 논리라 하며 원천 비판하고 나서며 현 정권을 옹호하기에 바쁜데 이야 말로 국민 속에 있는 정치 시각에 대한 적폐이다.
자신의 뜻과 다르더라도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더 퍼지에 나오는 숙청의 날은 무비판적으로 긴 시간동안 이어 질 것이다.
숙청의 날을 제정한 리더(영화 상 대통령)가 집권 한 이후 실업률 1% 그리고 현저하게 범죄율은 떨어져 간다. 사람들은 결과만 보고 과정을 보지 못하고 숙청의 날을 옹호하고 리더를 옹호하며 서로 죽이는 것을 즐기며 폭력 욕구를 해소 하고 있다.
현 정권에서도 지금 숙청의 날을 진행하고 있다.
그 동안 국민들이 가지고 있었던 정치에 대한 불만을 이명박근혜에게만 쏟아 붓고 있으며 해소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자유한국당이 철 지난 종북놀이에 또 다시 집중하고 있다하는데 종북, 빨갱이 사상(흑백논리)이나 적폐청산이나 매나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적폐청산들도 중요하지만 점 점 일자리는 줄어가고 있고 이로 인해 젊은이들은 결혼을 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해결을 우선 시 하고 그리고 시간이 남으면 해야 하는 것이 적폐청산인데 현재 접한 문제들은 등안 시 하고 적폐청산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아르바이트, 도가다를 합하여 실업률이 줄어들었다 구라를 치고 있는데 이들의 비중이 늘어 오히려 결혼 적령기에 든 젊은이들이 원하는 일자리는 줄어들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공무원의 수를 늘려 국고를 탕진하는 얼토당토 하지 않은 행위를 하는데 세금을 내는 사람들은 줄이고 세금을 쓰는 사람들을 늘리니 국민들만 죽어 나갈 지경이다. 지금은 숙청의 날에 눈이 어두워 정작 봐야 할 것들을 외면하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안철수가 독일에 가서 성공 사례들을 살펴보고 있다. 그럼에도 또 이를 무조건 비판하는 일부 사람들이 있는데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문재인이 해야 할 것은 지금 안철수가 하는 것처럼 새로운 산업 육성인데 적폐(종북)놀음만 하고 있으니 갑갑한 일이다.
노동자에 대한 처우 개선 그것을 위한 공무원 복지 확대?
경제와 관련 낙수효과는 부정하면서 복지의 낙수효과에 대한 기대는 왜 그렇게 큰지 도무지 이해 가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트럼프를 가진 미국이 부럽다. 남의 나라 가서도 당당하게 행동 할 수 있으며 자동차는 미국에서 만들어야 한다는 둥 더 이상의 무역 적자는 없어야 한다는 둥 자국을 위한 정책을 당당하게 하니 말이다.
어메리칸 펄스트.
트럼프의 행동이 다소 급격하다지만 미국은 충분히 이를 실행 할 힘을 가지고 있고 그의 급격한 행동과 발언은 장기적으로 봤을 때 미국에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 온다.
현 정권에서 부족한 것은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숙청의 날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비판할 사람들이다. 그래서 유일하게 필자만이라도 찰리 역할을 하고자 한다.
몰랐으면 몰랐지 가족과 같이 보면 불화가 생길 수도 있다.
특히 가부장적이고 고지식한 가정은 현재 가족구성원으로서 의문을 가질 것이다.
정말 내가 제대로 한 인간으로서 대접을 받고 있는가.
아니면 괜히 뜨끈한 사람이 찰리 욕을 지나치게 할 수도 있다. 미리 혁명을 방지하기 위해서.
역사에서 알려주듯 혁명이 일어나기 전 집정자들은 혁명을 막기 위해 위정자나 이단자로 몰아 방지하고자 한다. 새벽이 오기 전이 가장 어두운 듯이 집권자들은 변혁의 바람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다.
집단에서 본다면 찰리는 문제아다.
하지만 찰리 개인이 가지고 있는 자연권을 존중한다면 응당 찰리 샌딘 가족처럼 그를 대해야 한다. 이기주의가 심화 되고 있다지만 이는 어느정도 가지고 있는 여유가 되고 있는 가정에서 두드러지는 현상이고 존 오웰이 말했듯이 ‘가난하고 무지할수록 권위체제가 확고하다.’
한국은, 헬조선은 아쉽게도 다른 나라 대통령이 무기 팔아먹으러 오고 대놓고 호구 대하듯이 해도 일본을 더 무시했다 자위하는 안쓰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정말 가난하고 무지하고 존심까지 없다.
이러한 습관들은 착실히 각 가정에 교육 되고 있다.
특히 가난하고 무지한 가정에 말이다.
본인이 어렵게 살아왔건 힘들게 살아왔건 후세대는 잘 살기를 바래야 하는데 무슨 심보들인지 ‘너도 이렇게 살아’라 독려하고 있다.
‘내 때는 말이야~’ ‘요즘 애들은~’
하나의 인간으로서 존중하고 잘 살기를 원한다면 이 영화를 보고 과연 내 자식이 저러면 어땠을까 한번 생각 해보라.
물론 필자는 그래도 찰리의 명치를 존나 때리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시각에 대해 개선의 여지를 가지고 있다.
계속 보고 있으면 인간의 나약한 모습을 알 수 있다. 자신의 나약함마저도.
살인이 용서가 된 날, 바깥에는 이를 즐기는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어 샌딘가족들을 위협하고 있다.
영화 초반에는 감정 이입 되어 '나 같아도 흑인 내 보내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 찰리 명치 때릴 생각을 하는 것이고.
그런데 생각 해 보니 왜 싸울 생각은 하지 않았는가이다.
나라 배경은 미국! 총기 사용이 자유로운 나라다. 은연중에 합리라는 개념에 빠져 겁쟁이가 되어버렸다.
합리와 나약함은 아무래도 비례한다.
마치 옴의 법칙처럼. 합리 = 나약함 * 이기주의
총이 없다는 우리나라 사정을 생각하면 단편으로는 이해 할 수 있다.
but 어찌되었건 싸워보지도 않고 꼬리를 내린 것은 유쾌한 결정은 아니였다.
별 다 中 별 넷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해 준다. 생명존중, 가족관계, 구성원에 대한 존중 등 등 이를 제하더라도 스릴러 영화다운 적당한 긴장감에 영화를 적극 추천한다.
19금이라 걸리기는 하지만 가족과 같이 봐도 괜찮을 듯하다.
과연 제임스는 살았을까 죽었을까... 살았으면 좋겠는데.
#태양광 상담은(010-2668-3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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